4) 인적 연망을 보여주는 자료들 ?

블라디보스톡 동방대학 문서 폰드번호 226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극동문서보관소에는 현재 한인이주관계, 한인귀화관계, 1905-1917년까지 한인의 독립운동, 1923년 이후 사회주의 건설기의 한인 등에 대한 자료가 집중되어 있다. 또한 Ф.244의 Оп.3, Д.353, Л.35쪽(22건)은 1911년 4월 14일-1918년 1월 24일 시기 한인 박페오도르 사제의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Ф.702의 Оп.1, Д.566, Л.293/294/294об./296/297(5건)은 블라고베쉔스크 본성당의 종교감독국과 프리아무르 군관구 사령부실, 하바로프스크 군경찰국 간의 한인 김탁세 신분조회 요청 및 확인문제에 대해서, Л.332-333/337/336-336об.(3건)은 1914년 12월과 1915년 1월에 자레체 선교지구(миссионерский стан/선교지부) 선교사 요안 톨마체프 사제와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 곤다티 간의 비국적자 한인의 거주지로부터의 이주문제에 대해서, Д.748, Л.14/16-16об.(2건)은, 1912년 4월, 5월 교회용도의 부지를 외국국적 한인들에게 임대해 주는 것과 관련,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와 블라디보스톡 및 캄차트카 대주교 예프세비(Евсевий)에게 요청하는 내용에 대해서, Оп.3, Д.443, Л.13-17/21-26(2건)은 블라디보스톡 3년제 선교대학 규정 내용과 1914년 1월 4일 종무성(Ведомство правослвного исповедания)과 신성종무원 산하 경제국이 국가두마에 제출한 ‘블라디보스톡 주교구의 한인개종을 위한 한인선교부의 조직에 국고지원하는 문제에 관한 사업설명’에 대해서, Оп.5, Д.143, Л.64-71об.(1건)은 포세트지구 한인선교활동 및 선교사, 교회건축, 선교지구 설립, 교육발전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극동국립역사문서보관소의 한인관련 문서군(Фонд)은 주로 Ф.1(연해주 주관리국/Приморское областное правление/1898-1917), Ф.2, Ф.28(블라디보스톡 시참사회/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Городская Управа), Ф.143, Ф.244(블라디보스톡 주교구 관리국/Владивостокское Епархиальное управление), Ф.226(블라디보스톡 동방대학교/Восточный Институт во Владивостоке), Ф.702(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 사령부실/Канцелярия приамурского 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а), Ф.704(아무르주지사/Военный губернатор Амурской области) 등이 있다. 또 Ф.28의 Оп.1, Д.377, Л.24-24об./25/29-29об./40-40об.(4건)은 최관흘의 예배소 건물부지 할당 청원문제와 장로교의 활동에 대응한 정교회 지도부의 성전 건축, 교리문답학습 강화 등의 실질적인 대응 조치들에 대해서, Ф.87의 Оп.1, Д.278, Л.19(1건)과 Д.1566, Л.3(1건)은 최초의 한인정착촌인 티진헤(지신허) 마을 촌장 최운국을 포함한 한인 3가구의 최초의 정교회 세례와 세례자들이 러시아 국적에 편입되며 행했던 선서문에 대해서, Ф.143의 Оп.5, Д.143, Л.72-72об.(1건)는 블라디보스톡 주교구 정교선교협회 위원회의 활동 이후 한인을 포함한 이민족 교화 및 교육문제에 대해서, Ф.226의 Оп.1, Д.375, Л.1-2об.(1건)은 블라디보스톡 및 캄차트카 대주교가 장로교의 침투에 대응해 한인들에 대한 호소문을 인쇄해 줄 것을 동방대학교(Восточный Институт)(현 극동국립대학교 전신) 학장에게 요청하는 내용과 부록으로 호소문 ‘한인들에게 고하는 말’의 내용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Ф.1의 Оп.2, Д.2020, Л.1/3/6(3건)과 Оп.11, Д.164,Л.3-4/4а-4аоб./5-6об./7/8-8об./9-9об./10-11/12-12об./13-13об./14-14об./15-15об./18/19/20-20об./21-21об./22/23-23об./28/29/32-32об./33-33об./35/36/37-37об./38-38об.(25건)은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최관흘과 이후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이에 대한 프리아무르 및 연해주 당국과 정교회 지도부의 반응 및 대응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1416년에 다시 나누어서 현감을 두고, 1646년(인조 24)에 連山ㆍ恩津과 합하여 恩山縣이라 하였고, 1656년(효종 7)에 각각 복구되었다. 즉 강하는 날 새벽에 齋任(掌議ㆍ直月ㆍ色掌)은 奴僕을 시켜 강당에 대자리를 깔고 책상ㆍ책ㆍ栍筒(찌통) 등을 준비해 놓는다. 이외에도 望記ㆍ秋收記ㆍ地籍圖ㆍ山圖ㆍ婚書ㆍ哀感錄ㆍ葬擇記 등 일상 생활과 관련된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관혼상제’에 대해서는 상례 때 조문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한 哀感錄을 비롯하여 先祖의 忌日에 제수마련 방식을 기록한 先祖忌日祭需定式, 또 先考大小祥輓祭抄, 그리고 致祭時日記 2점이 있다. 문학박사 小川剛의 서문이 있으며, 自序에 조선사 5편을 지었다고 하나, 4권은 欠本되었다. 서정천(西井川)· 그밖에 광천(光川)·成造有司 2명, 錢穀有司 2명, 書齋有司 2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안동권씨와 성주이씨가 각각 1명씩이다. 都料匠 3명의 이름과 거주지를 기재했으며, 供養僧 2명은 이름만 기재되어 있다.

卞致洪은 1868년 당시 원납전으로 葉錢 800냥을 납부하였는데, 1872년 원납전 3000냥에 준하는 철물 10근이 배당되자 소지를 올려 除減을 요청하였다. 러시아국립도서관은 현재에도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으로 과거 구소련 당시 레닌국립도서관이었으나 소련 붕괴후 현재의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장로교가 블라디보스톡에 공식적으로 출현한 것은 1909년이다. 당시 최관흘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의 선교활동으로 블라디보스톡, 달네레첸스크, 하바로프스크, 하얼빈 등지의 한인 정교도들이 대거 장로교로 개종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는 정교회의 독점적인 상황을 깨뜨리는 위협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만큼 정교회 지도부를 크게 긴장시킨 큰 사건이 되기도 했었다. 우선 이 문서군들 중에서 한인의 정교회 및 개신교 종교활동과 관련, 연구자에 의해 직접 입수가 되어 해제가 된 문서들을 다음과 같다. 인천오피 관련문서들은 특히 문서군별로 입수가 되어 당시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류가 다양한 만큼 당시의 구체적인 면모의 부분들을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917년 『家庭簡牘綴』은 公州公立農業學校 학생 김문현이 가정에 올린 편지를 모아 기록해 놓은 필본 편지 모음으로, 당시 留學生活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이 방침에 따라 1993년부터 블라디보스톡 주청사 옆에 자리잡고 있는 연해주 문서보관소로 톰스크의 문서들이 재이전을 시작하여 현재는 이전이 거의 완료되었다고 한다. 이중에는 1920-30년대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상황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들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 밖에 원동 지역 폰드가 블라디보스톡에 와 있으나 아직 미정리상태에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문서를 효과적으로 연구 관리 할 수 있는 인력이 블라디보스톡에 있기 때문이었다. 극동문서보관소는 원래 블라디보스톡에 위치하고 있었다. 강한규와 그 형제들은 대원군 집권기에 대원군과 연계되어 있었다. 특히 1925년에는 卞元植이 宋子大全重刊慶南分所都廳에 추천된 것이 이채롭다. 1958년 民政廳, 1997년 7월 文化處에 예속되었던 대만성문헌위원회는 1999년 7월 대만성정부에 직속되었다가 2002년 1월 1일자로 국사관에 예속되어‘國史館臺灣文獻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2년 11월 현재 본관은 수리 중이기 때문에 아직 러시아어 잡지를 제외하고 단행본 및 외국 잡지들은 열람 및 복사가 불가능하다. 본 조사의 대상인 북한 신문 잡지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다.